대상: 33세의 직장 여성인 부인 A씨

증세: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늘 외톨이로 느껴서 벌써 직장을 세 번이나 옮겨다녔음, 2009년 1월에 4번째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음. 새로 구한 직장에서는 적응을 해 나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인관계 개선이 확연히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진단명: 대인공포증, 회피적 성격장애, 불안증(시선 공포증), 심인성 질환(편두통)

연결: 인터넷에서 치료자의 홈페이지를 보고 치료를 받으러 왔음

치료 기간: 1회에 2시간씩 1주일에 1회 치료 회기로 2012년 5월까지 부인 A씨는 치료자에게 지금까지 총 4년 6개월 째 정신분석 심리 치료를 받고 있음. 부인 A씨는 직장에서 동료들과 잘 지내게 되었고 원장 선생님과 병원 직원들과도 잘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 피임으로 자녀 출산을 미루어 오다가 1년 전부터 임신을 계획하고 임신을 하려고 시도를 했으나 임신이 되지 않아서 고통을 받아 오다가 2011년 10월 달에 임신이 되어 지금 임신 3개월 째로 태아 교육을 위해서 직장을 그만 두고 집에서 쉬고 있다. 그녀는 임신 9개월까지 치료자에게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그녀 자신을 분석하고 그녀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는 분노와 노여움을 털어 내려고 노력을 하였다. 마지막 임신 9개월에 그녀는 치료를 중지하고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바꾼 대표적인 치료 사례로써 소개하고자 한다.

 

치료의 과정

 부인 A씨는 치료자의 태교의 중요성을  받아들여서 직장을 그만 두고 집에서 쉬기로 결정을 했다. 그녀의 남편도 부인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그녀는 유치원 시절부터 피아노를 치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교회에서 성가대의 반주를 해 오던 그 때를 회상하며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서 피아노를 연습을 재개하고 그리고 주 중에 1주일에 1회씩 인형 만들기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직장을 그만 둔 후에 일상생활이 밤과 낮이 바뀌고 힘들어 했으나 몇 주일 후에 곧 생활은 정상으로 되돌아 오고 일상 생활은 균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최근에 양모(계모)에 대해서 분노하고 노여워했다. 그녀의 친 어머니는 그녀가 8년 전에 처음 치료자에게 치료를 찾았을 때 1년 전에 중년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했고 교회에 목사님이어던 아버지는 목회자가 독신으로 오래 있게 되면 신도들의 유혹에 스켄달이 일어나기 쉽다는 권유를 받아들여서 어머니의 사망 후 6개월 만에 재혼을 하게 되었고 그 새어머니(양모)가 지금의 양모라고 치료 초반기에 소개를 해서 알 고 있었다.

 지난 달에 양모는 직접 A 부인에게 알리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어떤 신학 대학원의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고 이 소식을 서울에 살고 있는 그녀의 언니로부터 한 시간 전에 전화로 듣게 되었다. 그녀의 언니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머니가 내일 신학 대학원 졸업식에 신학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오늘 저녁에 올라왔고 전화 통화로 내일 여동생(A 부인)과 함께 어머니 졸업식에 참석하겠다고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다"고 전화가 걸려왔었다. 이 소식을 듣고 A 부인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오늘이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 기일(제삿날)인데 양모가 기고만장해서 대학원 학위를 받으러 올라왔고 언니는 A 부인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내일 동생과 함께 졸업식을 축하하러 가겠다고 약속을 한 것에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고 했다. 언니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려고 하던 참에 아버지로부터 결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전날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제사 날)이어서 마음 속에서 기분이 찹찹하던 차에 양모가 신학 대학원 학위를 받으러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통화에서 아버지에게 분노가 그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녀는 대뜸 아버지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대학원 학위를 받게 되었다는데 축하를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장학금을 타서 공부를 했나요?"라고 묻게 되었고 아버지가 그런 것이 아니고 짬짬히 틈을 내서 공부를 한 것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사정을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전화를 엿듣고 있던 양모가 전화를 바꾸어서 "학비는 생활 비용으로 공부를 한 것이 아니고 틈틈이 생긴 용돈으로써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라고 변명을 하게 되었고 이 변명에 A 부인은 목소리가 떨리고 마음의 안정을 잃어 버리고 폭발을 했다. A 부인은 울면서 "남동생은 대학을 중퇴하고 제대로된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하고 겨우 밥벌이 만하고 있는데 그가 대학에 다닐 때 어머니가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동생의 학과 동료들이 모두 일본에 산업 시찰로 가게 되었는데도 부모님의 돈 타령으로 동생 혼자서 일본에 못갔고 그리고 대학 때 차비와 점심값을 주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매일 같이 얼마씩 타다 쓰다고 결국 학교를 자퇴했는데 왜 부모님을 동생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색하면서 매번마다 우리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장학금을 타야 한다라고 압력을 넣었는데 정작 어머니는 공부를 하면서 장학금을 타서 공부를 했느냐?"는 취지로 말을 한 것이 서로간에 갈등으로 폭발을 한 것이었다. 양모는 "남동생이 그의 학과 동료들이 일본 산업 시찰을 갔는데 돈이 없어서 남동생만 혼자서 빠지게 된 사실을 그 때 왜 말을 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지금까지고 그 사실을 몰랐고 용돈도 제대로 주지 않았느냐?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A 부인의 이야기를 전면 부인을 했다. 부모님은 그 전에도 "남동생이 대학을 중퇴한 것은 그가 스스로 공부에는 더 이상 뜻이 없다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공부를 그만 둔 것인데 부모님의 지원 부족으로 그만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을 늘 해 오고 있었다. 전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으나 분노한 양모는 큰 사위(언니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1시간 동안 분해서 못 살겠다고 울면서 통곡으로 하소연을 했고 A 부인은 그 다음 날 양모의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 부모님과 단절이 되었다.

 A 부인의 양모에 대한 분노는 이유가 있었다. 친 어머니는 암으로 사망하기 전에 그녀가 상당한 금액의 사망 보험에 들었었고 엄마가 사망 후에 그 사망 보험금(약 1억-2억 정도의 금액-부인은 정확하게 그 금액을 모르고 있었다)을 받게 되었고 그 돈을 아버지의 재혼 후에 부동산 투자로 아버지가 은퇴 후에 살 집과 약간의 땅을 사는데 투자를 했다고 아버지로부터 이후에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A 부인은 그 돈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버지의 재혼 시점에서 큰 언니는 직장에 나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A 부인은 간호 대학을 졸업하고 xxx 종합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었고 여동생은 A 부인의 뒤를 따라서 간호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별로 어려움이 없었으나 남동생은 군 복무 중에 친 어머니의 사망과 아버지의 재혼을 겪게 되었고 전역해서 휴학 중이던 대학에 복학을 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A 부인의 형제들(언니, 여동생, 남동생, A 부인)은 아파트를 전세내어 집을 나와서 같이 살 게 되었고 그 때는 남동생이 별 문제가 없었고 복학해서 밝은 표정으로 그의 학우들을 집에 초대를 해서 잘 지내는 것으로 보였다. 곧 언니는 결혼을 분가를 했고 A 부인은 병원에 기숙사로 그리고 여동생은 졸업 후에 병원에 직장을 얻어서 병원에 기숙사로 들어가고 혼자 남은 남동생은 결국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남동생은 용돈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매일 같이 아버지에게 차비와 점심값을 요구를 했고 아버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용돈을 아들에게 주었지만 호주머니에 돈이 없는 때는 양모에게 돈을 타서 아들에게 주었다. 양모는 남동생에게 들리는 말로 "아버지의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아들이 빼앗아 간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 말을 이후에 양모로부터 직접 A 부인이 전해들었다고 분노했다. 목사인 아버지도 용돈이 없이 어렵게 사는데 용돈이 생기면 아들이 다 빼앗가 가서 목회 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남동생은 대학의 학과 동료들이 전부 일본에 산업 시찰을 가는데 돈 때문에 혼자만 빠지게 되었고 이후에 동료들과 어울지지 못하고 외톨이로 남게 되었고 대학생활에 적응 문제를 일으켰고 그 때 인터넷 게임에 빠져 들었고 또 사귀던 한 여자 친구와 휴대폰 통화료가 한달에 30만원 정도가 나오면서 부모님의 분노가 폭발했고 이후에 남동생은 결국 학교를 자퇴를 하고 집을 나오게 되었고 몇 번의 공부원 시험을 준비를 하다가 실패하고 지금은 혼자서 일자리를 얻어서 생활을 하고 있느나 일용직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에 남동생이 누나인 A 부인에게 전화를 해서 "누나!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봉급이 밀려서 지금 생활 비용이 없으니 50만원만 빌려달라"고 해서 그녀가 그 돈을 부쳐주었다고 했다. 그 시점에서 작년부터 아버지가 공황 장애로 목회 일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 서울에서 종합 병원에서 진찰을 받으셨고 그 결과는 정신 장애로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나 별로 진전이 없어 지금도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알고 있었다. 지난 해 연말에 그녀는 아버지를 방문해서 아버지에게 시골 교회의 어려움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서 그러한 것 같으니 교회 일에서 은퇴하는 것이 아버지의 건강에 좋겠다는 건의를 아버지에게 했으나 아버지는 지금도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당장 교회를 떠나면 생계 때문에 할 수 없이 아버지는 교회 일을 그만 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문제는 아버지가 지금은 혼자서 목욕탕에 갈 수 없어서 양모는 남동생에게 연락을 해서 남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고 목욕탕에 함께 갔다 오라고 몇 번의 전화를 했으나 온다고 약속을 했던 남동생이 빨리 오지 않자 서울에 큰 사위(큰 언니의 남편)에게 하소연을 해서 큰 사위가 처남에게 왜 부모님에게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라고 직책을 받으면서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그 시즘에서 A 부인은 남동생으로부터 생활 비용이 고갈되어서 아버지를 모시고 목욕탕에 갈 돈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즉시 갈 수가 없었다는 하소연을 남동생으로부터 듣게 된 것이었다. 남동생이 직장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에게 목욕 비용을 부담시킬 수가 없었고 그리고 손에 목욕비가 없어니 아버지에게 달려 갈 수가 없었다고 호소를 했다. 남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A 부인이 분노가 폭발을 한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 제대로 학비, 용돈을 챙겨주지 않아서 남동생은 학교를 중퇴를 했는데 이제와서는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부모님의 모습에 분노가 터진 것이었다. 최근에 A 부인은 치료의 과정에서 자신의 자아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이 상당히 있었는데 양모는 그 돈을 남동생의 학비, 용돈으로 사용하지 않고 부모님의 노후 대책으로 사용해서 결국 돈 때문에 남동생은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고 양모의 비열한 짓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죽은 전처의 사망 보험금을 후처가 노후 대책으로 부동산에 투자해서 아들의 학비, 돌봄을 소홀히 해서 언니, A 부인과 여동생은 그나마 다행히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서 결혼을 하고 그런데로 살고 있는데 하나 뿐인 아들인 남동생은 요즈음은 거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는데 그 대학 조차 2학년에 다니다가 자퇴를 한 것에 노발대발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남동생을 이야기를 하면서 눈문을 흘렸다. 남동생은 고등학교 시절에 그 지역에서는 그 당시 고교 평준화가 되지 않았서 시험으로 실력이 있는 그 지역에서 가장 후수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가난한 목회자의 자녀라는 것 때문에 학비가 싼 국립 대학인 xxx 대학에 들어갔고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대학 1학년을 마칠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1학년의 마치고 군에 입대해서 군복무 중에 어머니가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군대 전역 후에 복학 후에 학교 생활에 적응에 실패해서 스스로 자퇴를 하게 된 것이라고 남동생이 너무 불쌍하다고 눈문을 흘렸다.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 교육으로 그녀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말에 복종적이 되었고 한번도 제대로 아버지, 어머니에게 자신의 의견들을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고 분노했다. 아버지의 재혼 후에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을 노후 자금으로 쓰기 위해서 부동산에 투자한 아이디어는 아버지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양모의 아이디어라는 것을 A 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돈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남동생의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양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동생이 자퇴 이후에 서울에 올라와서 큰 누나, 둘째 누나(A 부인)에게 의지해서 공부를 재개 하려고 시도를 했으나 몇 개월 후에 실패해서 귀향을 했고 고향에서 도심지로 나와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포기를 하고 보수가 적은 일용직을 얻어서 지금은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는 남동생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 시점에서 A 부인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남동생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를 하려고 하니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이 있지 않습니까? 그 돈으로 남동생을 지원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제안을 했을 때 아버지의 그 때 얼굴 표정을 지금도 기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남감해 하시면서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때는 엄마의 사망 보험금은 이미 양모가 처분을 해서 노후 자금으로 부동산에 투자한 이후여서 아버지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A 부인도 잘 알고 있었다.

 양모에 대한 분노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양모와 재혼을 해서 10년의 세월이 훌쩍 넘어갔다. 결혼 이후에 한번씩 명절 날에 아버지 집에 들리면 아버지는 점점 어린 아이처럼 말이 없어지고 양모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아버지를 어린 아들 다루듯이 아버지에게 일일이 간섭을 하고 아버지는 양모에게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양모가 하라는 대로 하는 불쌍한 어린 소년이 되어간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치료의 과정에서 A 부인이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마음 대로 말도 못하는 아버지가 안쓰럽다고 토로 했었다. 이후에 아버지는 점점 어린이처럼 변해갔다. 시골 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회 증축으로 은행 빚을 얻어서 증축한 결과 빚에 쪼달려서 교회는 더욱 더 어려워지고 신도들을 나이 많은 사람들만 남고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들어서 빈 껍떼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A 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양모의 아이디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친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어머니는 한번도 택시를 탄 적이 없었다고 틀어 놓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양손에 무거운 시장에서 산 부식들을 들고 끙끙거리면서도 차비를 아끼려고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양모는 체면 때문에 항상 택시를 타고 다녔고 목회자의 사모님으로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아버지는 양모와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끝에 이제는 공황장애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목욕탕에 가지도 못하는 무능한 어린 아이로 변했고 양모는 기고만장해서 목사님의 사모님으로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는 석사 학위를 가지는 것을 보고 분통이 폭발한 것이었다. 남동생은 엄마의 사망 보험금을 두고도 돈 때문에 학교에 적응을 할 수 없서 학교를 자퇴를 했다. 남동생이 매일 같이 차비, 점심값은 아침에 학교에 가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느냐? 자기 표현이 없는 남동생은 자신의 어려움들을 한번도 부모님 혹은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러한 말을 표현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부인 A가 잘 알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한달 용돈이 약 최하 20만원에서 최고 30만원이라는 것은 이미 20년 전에 치료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시점에서 나온 한단 평균 용돈이었다. 이 용돈 속에는 책값, 점심값은 제외한 순수한 용돈이라는 점이다. 부모님의 형편을 아는 자녀들은 입에서 용돈 이야기를 차마 입밖에 끄낼 수가 없었다는 것은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았던 수 많은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의 입을 통해서 치료자는 잘 알고 있다. 양모는 목회를 하는 아버지에게 하루 차비 정도로 몇 만원을 식을 주는데 이것을 아들이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 몽땅 가지고 가는 것이 못마땅 했다는 것이 양모의 입에서 아버지에게 몇 푼 안되는 돈을 주면 아들이 몽땅 빼앗아 가 버린다는 하소연이 A 부인의 귀에 들린 것에 분노했다.

 특히 그녀는 명절에 한번씩 친정에 들리면 아버지의 친 자녀들은 자신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기를 펴지 못하고 양모와 양모의 친 자식들(양모는 재혼 전에 전 남편과 사이에 아들, 딸이 있는데 모두 결혼으로 분가를 했다)이 함께 모이면 A 부인의 형제들은 모두가 제대로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함께 어울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을 부인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또한 양모는 말주변이 좋아서 수다쟁이로 가족들의 대화를 독점하고 아버지를 평가절하하는 모습을 부인을 늘 보와 오면서 속 상해 했다.

 그녀는 양모에게 엄마가 남긴 사망 보험금은 부모님의 노후 자금으로 사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원금과 이자를 합쳐서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했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그것은 양모가 잘못한 것임을 그녀가 확신을 했다. 여자 형제들은 그른데로 그 돈에 대해서 미련이 없으나 남동생이 돈 때문에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결국 학교를 포기했다는 것이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양모는 틀림없이 돈 이야기를 하면 "그 사망 보험금은 너네들이 결혼을 하고 그 때 생활 비용으로 너네 들이 다 사용하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러나 부인 A는 그 말에 대해서 "그 돈은 일반생활비용으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돈은 엄마 사망 보험금입니다. 그 엄마의 사망 보험금이 없었다면 우리가 결혼을 하지 못했겠네요? 우리가 공부를 하지 못했겠네요? (여동생은 그 때 대학 3학년이었음) 엄마의 사망 보험금이 없어도 우리는 결혼을 했을 것이고 어렵지만 학교를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특별한 돈은 남동생 한데 썼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그 만큼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재혼을 결정을 했을 때는 전 부인의 자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재혼을 했을 터이고 그 자녀들이 다 컷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재혼을 했을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돌보아준다는 것은 똥귀저기, 식사를 챙겨준다는 뜻이 아니고 자녀들의 마음을 챙겨준다는 뜻입니다. 남동생, 여동생은 그 때 대학생이었고 적어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배려와 관심을 가져주었어야 했습니다. 다 커서 성인이 되었으니 내 몰라라 한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남동생은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망 후에 심리적인 불안정으로 고통스러워했을 것인데 용돈, 학비 등에 신경을 써서 돌보아주었어야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자신이 죽어서 남긴 돈으로 후처의 노후 자금으로 돈을 쓰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자녀들에게 돈 문제들이 없었다면 그 돈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안스러워하지 않겠지만 엄연히 남동생이 엄마의 사망 보험금이 있는데도 돈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것을 보면서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남긴 사망 보험금이 다른 곳으로 사용되어 새어 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느냐? 남동생 한데 그 돈이 들어가서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하도록 해야 하는데 왜 말이 없이 가만히 바보처럼 양모가 하는 행동만 쳐다보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로 있느냐"하고 질책을 하는 것 같아서 괴롭다고 했다.

 그녀는 언니에게 양모한데 "엄마의 사망 보험금은 지금당장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 원금에 이자를 합친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하지는 이야기를 했을 때 언니는 시컨둥 하게 반응을 하는 것을 보고 노발대발했다. 어떻게 언니는 잘못된 것을 보고도 아무 느낌이 없는가? 언니는 그 돈이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닌 것 같았다는 말을 했다고 더욱 분노했다. 여동생에게 그러한 말을 했을 때 여동생은 반응이 언니와 달랐다. 여동생이 대학 3학년 때 학비를 대출해서 공부를 끝내고 병원에 취직을 했을 때 양모는 이제 네가 직장을 가졌으니 은행 대출한 돈은 네가 갚아라 라고 해서 서운해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여동생은그 돈은 엄마의 사망 보험금이라는 특별한 돈이기 때문에 생활 비용이나 다른 용도에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언니의 말에 동의를 했다.

 그녀는 그 사건 이후에 약 3개월 동안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고 분노해서 그런 생각들이 시도때도 없이 침투해 들어오는 바람에 힘들었고 불쾌하고 우울해서 치료 회기 시간에 약 3개월 동안 계속해서 분노를 말로써 표현하고 토해내도록 했다. 3개월이 지나가면서 그녀의 분노의 침투적인 생각들을 점차로 줄어들어갔고 그녀는 그 이벤트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양모에 대한 분노에 더 붙여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엄청났다. 아버지가 양모에게 꼼짝 못하고 자기 주장이 없어 처신을 잘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그렇게 된 것임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와 친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치료 초반기부터 엄청났다. 양육의 과정에서 강압, 권위, 너무 경직된 양심 때문에 그것이 그녀의 자아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은 그녀가 확실이 알고 있었다.

 임신 9개월이 되면서 그녀는 마지막 출산을 한달 앞두고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다. 앞으로 출산 이후에 자녀를 양육을 하면서 치료자에게 계속해서 치료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치료의 종결로 이어질 것인지는 아직도 결정을 하지 않았다.

 

치료 결과:

 그녀의 치료 계약 날짜를 체크를 해 본 결과 그녀는 2004년에 치료를 시작해서 1년 동안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았다가 이후에 5년 후에 그녀의 결혼 직후에 다시 치료자에게 서울에서 2008년 12월 4일에 치료를 재개해서 지금까지 총 치료 기간이 4년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녀가 초반기에 치료자에게 오기 직전에 치료자에게 보낸 e-메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e-메일을 보면 그녀는 심리치료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문제의 해결 가능성에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보였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심리치료 혹은 정신분석 치료는 결과가 좋지 못하고 돈만 날릴 것이라고 심리치료를 받지 말라는 경고를 강력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반은 희망을 걸고 나머지 절반은 치료 결과에 대한 의심으로 치료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제목 |
힘들어서요..  
보낸날짜 | 2004년 3월 30일 화요일, 오후 12시 10분 13초 +0900
보낸이 | xxxxxxxx    무선메시지
받는이 | <jongmankim@hanmail.net>
 

제가 보기에 저는 성격 장애자 같습니다..

대인관계가 너무 힘들고 그래서 직장을 그만 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면 경제적으로 힘들기에 그럴수도 없는데요

그래서 직장을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으면 하는데...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지 결정을 못내리겠습니다..

이왕이면 경험이 많으시고 적절한 치료를 해주실수 있는 곳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잔아요

챙피하게도 제 직업이 간호사예요...

이런 성격장애를 가지고 얼마나 더 견딜수 있을지 모르겠구요

치료의 효과도 의심이 스럽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곳은 지방이라서 치료 수준도 대도시만 못할거란 생각이 듭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 모르게 치료를 받고 싶거든요..주위사람에게 정신과 치료 받는다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되어 버리는거 같아서요

제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도 가지고 있거든요

젤 문제가 인간관계 더라구요

몇년 동안 고민을 하다가 요즘에도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지를 반복하다가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정말 밑져야 본전이다는 생각으로 제게는 정신과 치료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망설여 집니다..

정말로 최고5년 정도로 치료를 받으면 100%로는 아닐지라두 70%정도 만이라도

대인관계에 어려움들이 없어질지 의심스럽구요...

효과는 없으면서 주위사람들에게 이상한 취급받고 취업도 못하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됩니다

교수님이 상담한 분중 좋아진 분들이 많이 있나요?

성격장애 자들도 마니 상담 하러 오나요?

 
제목 |
망설이는 이유
보낸날짜 | 2004년 6월 03일 목요일, 오후 17시 52분 57초 +0900
보낸이 |  xxxxx   무선메시지
받는이 | "김종만" <jongmankim@hanmail.net>
 

좀전에 남친이랑 통화를 했는데 서로 다투다가 남친이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다툰 이유는 제가 정신분석치료를 받겠다고 했더니 남친이 말리더라구요

그것때문에   다퉜어요

제가 직장생활 할때 주기가 있는거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때가 없지만 그래도 견딜만한때가 있고  못견딜정도로 힘든 때가 있습니다.

주로  못견디게 힘들어질때 치료에 대한 생각들을 더 많이 하게 되는데 지금이 이때인거 같습니다.

그래서 교수님 사이트. 그밖에 다른 사이트를 맴돌면서 정신분석치료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고

나한테 정말 효과가 있는것인가 하는 가능성들을 살피죠

남친에게 나란 사람에 대해 말해줬고 도와주기를 바랬죠

그랬더니 남친도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보고 다니는 대학의 상담학 교수님에게도 도움을 청했습니 다.  저도 그 교수님께 메일로 제 문제를 대충 알렸는데 교수님은 정신과 치료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이셨습니다..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의 일에 신경을 쓰라고 (?)  머 대충 이런 의미의 글들로 답장을 보내셨더라구요...

제가 김종만 교수님께 메일을 보낸 시기과 비슷한 시기입니다..

남친이 어디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치료비용이 비싸고 인터넷상의 사이트 등에 있는 글들은 상업성이 지나치고 믿을만하지도 않고 ...어쩌고 하면서 내가 교수님(김종만) 께  상담받고 싶은 마음을 접게 하더라구요

오늘 제가 힘든 주기여서 도저히 안되겠길래 그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제 문제에 대해

다시 말했습니다.  치료 받아야 할거 같다고 했더니...또 반대를 하더라구요

교수님은 종교가 있습니까?  저와 남친은 기독교 인데 남친이 신학생이거든요..

남친이 머라고 하냐면   어디서 자료를 찾아 봤는지 치료후에 나빠진 경우가 대부분이라는거예요

지금은 제가 밖에도 나가고 사람도 만나고 하는데 더 나빠지면 집안에만 있게 될거라네요

제가 그랬죠  나빠진 경우는 치료받는 도중에 중단해서 그렇게 될을거라고 ....이것은 단기간에 치료되는게 아니라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남친이 또 그래요..이 치료가 창조론과 진화론 2가지에서 출발하는데 정신분석은 진화론에서 출발한다고....

남친이 반대하는 이유가 진화론에서 출발하는것과 치료후에 더 나빠진경우가 대부분아라는 것때문이래요..

난 여기서 더 나빠져도 괴롭고 그냥 이대로도 괴로우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면서 치료받는거 반대하지 말라고 했죠 ..난 오빠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니까....너 치료받는거 안말릴테니깐 받아라  대신 지지는 못해준다  치료받는거 좋게는 생각안한다..  거의 머  난 상관업다 관심 안두겠다 이런식으로 말하더라구요

내가 울면서 그리고 화내면서 막 말하다가 전화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내 괴로운 상황을 다는 모르더라도 알고 있는 단 한사람이 이런식으로 나오니깐 정말 배신감이

느껴지더군요...정말 제가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은 사람이라면 헤어지고 싶은 심정 입니다..

이렇게 통화를 하고나니 힘이 쭉 빠져 버렸습니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의욕도 사라지고 설령 받는다 해도 혼자서 부산까지  찾아가서 교수님찾아서

상담을 받는다는게 상상만으로도 힘에 부칩니다   여기는 전남 xx시 입니다

돈문제도 남친이랑 상의해 봐야 하는데...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든 상황인데 남친마저 이런식이니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궁금한거는 상담후(치료?) 나빠진 경우가 더 많냐하는거구요

정말 교수님과 라포를 형성할수 있는냐 하는거구요..

제가 좋아질수 있냐 하는 것입니다..

오빠말을 듣고 있으면 정신분석이라는 것이 무용지물처럼 느껴집니다.

오빠말이 아니더라도 저 스스로도 정신분석이라는것이 정신만 분석할뿐이지

지금의 현실을 더 긍정적으로 살수 있게 하는 도움은 안될거라는 생각도 가끔 들거든요

참고로 남친은 융통성이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데요

 

ㅕ 치료가 시작 되면서 그녀는 치료자에게 오는데 4 시간 그리고 돌아가는데 4시간 도합 8시간을 소비를 하면서 2시간의 심리치료를 받기 위해서 1년 동안 꾸준히 심리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1년간 치료를 받고 난 후에 치료 비용 문제로 치료를 중단을 했다. 치료자가 그 시점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고 그녀가 결혼을 하기 이전이라 그녀에게 간호사 자격증이 있으니 서울에 와서 직장을 가지는 것이 어떻냐?고 치료자가 제의를 했을 때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서울에 친척들이 없고 그리고 연고도 없는데 어떻게 서울까지 가느냐?로 치료자의 제의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나가면서 치료자는 A 양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다. 세월이 5년이 흘러간 후에 메일에서 그녀는 언니가 결혼해서 서울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서울로 직장을 구해서 오게 되었고 얼마 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메일로 연락을 보내왔다. 치료 중단 후에 5년 만에 다시 치료가 재게 되었다.지난 4년 동안의 치료 과정을 알고 싶은 분은 다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그녀가 메일에서 밝혔듯이 그녀는 치료자의 홈페이지를 읽어 보고 정신분석이 최소 치료 기간이 평균 5년 정도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메일에서 5년간 치료를 받아서 적어도 70%의 성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하고 소망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서 그녀는 위에 남자 친구인 그 xxx 남자 친구는 그 이후에 헤어졌고 그녀가 서울에 올라와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고향 출신인 현재의 남편을 만나서 약 10개월 정도 사귀다가 결혼을 했고 지금은 두 사람이 열심히 저축을 해서 집을 하나 마련해서 전세를 주고 있다. 그리고 원하는 시점에서 어렵게 임신을 해서 아들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직장 생활에서 동료들과 갈등, 병원의 원장님과 그리고 사무직원들과의 갈등을 하나씩 해결하고 그녀가 임신 3개월에 직장을 그만 둘 때까지 직장생활을 큰 어려움이 없이 그들과 같이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직원들 회식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게 되면서 동료들과 원장 선생님이 임산 7개월-8개월까지 병원헤서 근무를 해도 좋다는 권유를 뿌리치료 태교 문제로 병원을 그만 두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그녀는 그녀가 원했던 치료 초반기 소망은 5년의 치료를 받아서 그녀의 문제의 70%를 해결했으면 하는 소망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A 부인이 5년 후에 서울에서 치료를 재개해서 1년 6개월 정도 지날 무렵에 그녀가 치료자에게 보낸 메일을 보년 그녀가 변화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을 찾겠다는 몸부림이 얼마나 힘든 고행의 길을 걸어왔는가?를 암시해 주는 메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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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안좋아지고 있습니다.

 
보낸사람
: xxxxx 2009.08.04 09:53 주소추가  수신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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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날로  제 상태는 안좋아지는거 같습니다.

점점 머리에 쥐가나는 증상이 자주 생깁니다.

저를 의식하고 주눅들어 있는 상황이 자주 생깁니다.

 

일요일 오후에 전남 화순으로 가족들이랑 여행을 갔습니다.

새엄마 가족들과 우리가족들이 모였는데 여행가기 몇일 전부터 여행가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그것때문에 스트레스였습니다.

내가 안가면 친여동생이 많이 섭섭해할거 같아서 가긴갔으나 이번여행으로 가족들과 저는 더 멀어진거 같습니다.

 

우리식구는 아빠랑 친남동생 여동생 여동생남편 저 이렇게  갔고 (언니와 형부는 못갔음)

엄마쪽은 언니, 형부, 언니 아이들 셋, 남동생, 올케, 남동생 아이1명, 엄마 여동생(이모), 아들, 이렇게 갔습니다.

우리가족은 하나도 즐거워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제부는 엄마쪽 사람들한테 잘보이려는지 말을 많이 걸고 대화를 하더라구요..)

엄마쪽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농담하고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콘도에서 일요일 밤에 모여서 저녁먹고 월요일 아침에 아침먹고 남자들은 풀장에 갔고 여동생과 저는 온천을 하고  점심에는 고기집가서 먹고 그러고 저는 전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있으면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쪽 사람들과 거의 대화를 안했습니다.

아빠와 남동생과 저  세사람이 비슷한 공통점이 있다는걸 느꼈습니다.

아빠는 갈수록 엄마쪽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우리식구 사이에서도 사람취급을 못받는거 같습니다.

누구하나 아빠눈을 마주치며 말하는 사람이 없고 아빠는 우리사이에서 완전이 겉돌고 아빠가 한마디씩하는 말을 맞받아서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냥 무시되어버리거나 못들은 말인것처럼 혼자말하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남동생도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식사차리는 시간에 주변사람들(엄마쪽) 눈치보면서 도와주고 기계처럼 행동만 하고 있고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족들과는 눈도 안마주치고 마주치더라도 금방 피해버리고 ..아니면 무슨 농담식으로 말을 건내면 그냥 말없이 웃거나 "그러게요"라고 짧게 대답해버리고 마니까 대화가 안되요..

 

아빠와 남동생과 저의 모습이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간호사들 사이에 있는 내모습이 아빠가 가족들사이에 있을때 겉도는 모습...남동생이 말없이 기계처럼 행동하는 모습...

 

그리고 여동생 남편(제부)도 은근히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우리가족보다는 엄마쪽 사람들과 잘어울리고 그쪽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대화를 하는데 우리쪽 남동생이나 저한테는 눈길을 잘안주고 우리아빠에게  잘보이려 안합니다.

여동생한테는 잘해주는데 제부가 이러니까 여동생에게도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여동생은 엄마쪽 가족들이랑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는건 아닙니다. 먼저 대화를 걸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부가 엄마쪽 사람들이랑도 대화하면서 동생에게도 말을 걸고 대화를 하니까 동생은 완전겉도는거 같지는 않게 보입니다.  그리고 여동생은 인상이 좋아서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대우를 잘해주는거 같습니다.

 

교수님 갈수록 저는 제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가족들과 있어도 가족의 단람함과 편안함을 느낄수 없고 내 집에 와서도 남편이랑 마음이 잘 안통하는거 같고(남편은 제가 불평불만하고 생각이 어른스럽지 못하고 애처럼 징징대는걸 싫어합니다..나를 좋아하는구나 내 생각을 존중해주는구나 인정받고  있구나 이런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직장에가서는 여러사람 눈치를 봐야하고...정말 내 속에는 내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어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어떤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게 점점 희미해지는거 같습니다.

혼자사는게 아니니까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기때문에 주변사람들 이랑 맞춰야하고 ...이러면서 내 의견은 없고 하니까 남 의견대로 따라만 가게 되니까 수동적이고 남들 의견에 반발하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니까 못마땅하고 이러면서 제 불만은 쌓여만 갑니다.

 

사는게 즐겁지가 않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게 즐겁지가 않습니다.

모두가 희노애락을 느낄수 없는 기계처럼 된다면 아마도 저는 편할거 같습니다.

 

누구앞에서나..주변에 누가 있거나 상관없이..내가 가진 불평불만..내 의견이랑 달랐을때 화를 내고싶으면 내고 짜증나면 짜증내고 빈정대고 싶으면 빈정대고 하소연하고 싶으면 하소연하고 이래봤으면 좋겠습니다.

내 감정을 아무런 콘드롤 없이 마구 하고 싶은대로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정말 누구하나 저에게 말거는 사람이 없을거예요..내가 유치원생도 아닌 성인이니까요.

어린이도 이렇게 막나가면 받아줄사람 없는데 말이죠.

 

어렸을때 친구여럿이서 어울려 본적이 없고 아무생각없이 나를 의식하지 않은체로 놀아본적이 없고 ,,자매들과도 수다를 떤다거나 같이 놀아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사회생활이 ,,,주변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즐겁고 편안하지가 않고 고역입니다.

거기다 심한 열등감까지 있어서 내자신 스스로도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상태가 심각한거 같습니다.

이러다 방안에만 틀어박혀있을까 걱정입니다..

저는 진지하고 심각한데  사람들은 그저 즐겁고 재미있나 봅니다. 

 그 이후에 다시 2년이 흘러갔고 이제는 2012년이 되었다. 그녀의 그동안의 변화의 과정을 더듬어 보면서 그녀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자신의 자아를 찾으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관리를 하고 적응해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의 심리적 관계들을 돌아돌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양모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분노하고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남동생이 어떻게 힘들 게 살 게 되었나?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남동생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녀가 정신분석 심리치료에서 최소 5년 이라는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4년 6개월이라는 기간이 아쉽지만 그녀는 출산 때문에 치료를 중단한 것이다.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부터 지금까지 따라 다니는 편두통을 가끔씩 나타나지만 강도는 이제 미미해져서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약간 아프다가 끝나는 수준으로 약해져서 그녀의 생활에 큰 불편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완전히 뿌리가 뽑혀서 제거되지 않아서 서운한 점도 있지만 그녀는 그 편두통이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몇 개월 전에 양모와 대판 논쟁을 했을 때 다른 때 같았으면 편두통으로 심하게 고통을 받았을 것이지만 그 사건에서는 편두통이 따라오지 않았다고 치료 회기 시작 때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이 양모와 크다란 갈등이 있고 난 후에 양모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지고 편두통이 오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이 났다.

 치료자는 그녀의 4년 6개월의 심리치료를 마감하면서 정말로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고 느꼈다. 30년 동안 정신장애들의 연구와 치료를 해 온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치료 과정에서 그녀가 유치원 때 "똑 순이"로 불우던 어린 소녀가 성인이 되어서 이제 그녀에게 붙여진 그녀의 재능을 100분의 1일라도 회복이 되었으면 하고 바람으로 그녀의 치료를 끝내려고 한다. 그녀야 말로 그녀 자신의 주어진 운명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나온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꾼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